“춤을 추는 대신 말로 들려주는 경험, 시각장애인과 공감하니 짜릿했죠”

안무가이자 무용수로 활동하고 있는 이경구씨는 “춤은 자신이 만든 세상”이라며 “자신이 만든 세상에 다양한 분들이 놀러올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진주 기자
무용음성해설가로 나선 이경구 현대무용 안무가
무대 위에서 무용수가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몸짓과 이야기는 관객의 눈을 사로잡지만 무용수들의 동작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시각장애인에게 무용 공연 관람은 상상력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지난 9월1일 경기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 ‘2021무용인 한마음축제’ 갈라 공연에서 시각장애인들에게 춤을 말로 전달하는 무대가 열렸다.
현대무용단 ‘고블린파티’ 소속 안무가이자 무용수로 활동하고 있는 이경구씨(29)는 이날 LDP무용단이 준비한 공연 ‘맙(MOB)’의 무용음성해설가로 나섰다.
무용음성해설은 장애와 비장애의 구분 없이 공연 관람의 접근성을 넓히는 ‘배리어 프리’ 공연을 위한 서비스다. 시각장애인이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작품을 느낄 수 있도록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무용수의 움직임과 무대 공간, 의상 등을 해설가가 말로 세세하게 설명한다. 시각장애인 관객은 객석에 앉아 헤드셋을 통해 해설가의 설명을 들으며 공연을 관람한다.
시각장애인 위한 ‘배리어 프리’ 공연, 한국선 시작 단계
지난 6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고블린파티 연습실에서 만난 이씨는 “지난해 6월 전문무용수지원센터에서 진행한 ‘무용음성해설가 양성을 위한 워크숍’에 참가하면서 무용음성해설을 처음 접했다”고 했다.
무용음성해설은 2000년대 초반부터 영국 노던발레단, 스코틀랜드 국립발레단, 미국 피츠버그발레단 등에서 운영해오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시작 단계다.
이씨는 워크숍에서 실제 무용음성해설 공연 시연을 위한 대본 작성과 전문 성우의 발성 수업 등 심화교육을 받았다. 그는 “워크숍에 참가했던 안무가와 무용수 중 저를 포함한 4인이 지난 갈라 공연에서 무용음성해설가로 참여하게 됐다”고 했다.
이들은 대본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수시로 안무가와 소통하며 안무 의도와 관객이 꼭 알아야 할 관람 포인트 등을 공유하고 공연 전 무용음성해설 리허설을 통해 시각장애인 관객이 공연을 제대로 경험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공연 전 의상·소품 만져보는 ‘터치투어’로 이해도 높여
공연 전에는 시각장애인 관객들과 함께 공연에 사용되는 의상이나 소품 등을 직접 만져보며 무용작품의 구성요소를 직접 느껴보고 공연에 나오는 춤 동작을 직접 따라해보는 등 공연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는 사전 행사인 ‘터치투어’를 진행했다.
“비장애인들은 팜플렛이나 하이라이트 영상을 통해 충분히 공연에 대한 정보를 찾아볼 수 있지만 시각장애인의 경우 정보를 취득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요. 터치투어를 통해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정보를 습득한 뒤 공연을 보면 비장애인들이 경험하는 것과 조금은 동등하게 예술적 경험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본 공연이 시작되면 해설가는 별도로 마련된 부스에 들어가 공연의 흐름에 맞게 대본을 읽고 해설가의 목소리는 헤드셋을 통해 시각장애인 관객에게 전달된다.
“공연의 형태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현대무용의 경우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다보니 해설을 할 때도 객관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상상의 여지를 남길 수 있도록 했어요. 예를 들어 무용수가 두 팔을 들어 위아래로 움직인다면 ‘팔을 새의 날개처럼 펄럭인다’고 표현하는 거죠. 눈으로 보는 관객도 시각장애인도 비슷하게 느끼고 경험하는 데 중점을 뒀어요.”
당시 공연이 끝난 후 한 시각장애인 관객은 “공연이 너무 좋았다. 무용수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어 신기하다”는 소감을 전했다. 그는 “공연을 보는 방식은 달랐지만 함께 감상평을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 짜릿했다”며 “기회가 된다면 내 공연에도 적용하고 싶다”고 말했다.
대본 작성·발성 수업 워크숍 후…‘모두가 즐길 수는 없었구나’ 자각
항상 무대 위에 올라 공연을 하던 그가 무대 밑에서 다른 무용단의 공연에 해설가로 참여하게 된 계기는 처음에는 호기심이었다. “배리어 프리 공연에 대한 책임감에서 시작한건 아니었어요. 움직임이나 이미지가 중심이 되는 무용공연을 언어로 설명하는게 가능할까 궁금했죠. 워크숍에 참여하면서 모두의 공간인 극장에서 모두가 공연을 즐길 수 있는 건 아니라는 뒤늦은 자각과 그런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긴 것 같아요.”
그는 “비록 한 번의 공연이었지만 한 명의 시각장애인이라도 공연을 관람하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이러한 활동은 분명 의미가 있다”며 “기회가 된다면 제 공연에도 적용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이씨는 “무용음성해설의 보편화를 위해서는 안무가와 무용수들을 대상으로 한 무용음성해설가 교육과 시각장애인 관객을 위한 인력 충원 등 배리어 프리 공연을 위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경구씨의 공연은 갓이나 한복, 사물놀이 악기, 부채 등을 원래의 용도와 관계없이 자유롭게 무대 위에서 사용하거나 마이크를 들고 랩을 하는 등 파격적인 안무로도 화제가 됐다. 이경구씨 제공
파격적 현대무용가로, 어린이 무용극 ‘루돌프’로 바쁜 연말
대학에서 현대무용을 전공한 이씨는 대학 재학 중 고블린파티에 입단했다. 고블린파티는 단원 모두가 안무가이자 공동 창작자로 구성된 독특한 형태의 무용단으로 한국의 전통 도깨비를 상징으로 내세우며 한국적 정서를 현대적이고 독창적으로 해석한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고블린파티에서 다양한 작업을 경험하면서 안무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대학 졸업 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창작과를 거쳐 안무가로도 활동 중이다.
이씨는 2014년 직접 안무와 춤을 선보인 ‘우주정거장’으로 신인상을 2016년 포스트젊은예술가상, 2017년 ‘꿔다놓은 보릿자루’로 요코하마댄스컬렉션 심사위원상 장려상 등을 수상하며 차세대 예술가로 주목받고 있다.
타고난 무용수로 보이는 이씨가 본격적으로 춤을 시작한건 고등학교 2학년 무렵이다.
수업 시간에 발표하는 것조차 떨리고 싫었다는 내성적인 성격의 이씨는 학교 댄스동아리에서 춤을 추는 순간만큼은 즐거웠다고 했다. 어느날 우연히 현대무용가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그는 발레나 고전무용과는 다른 현대무용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당시에 저는 춤을 춰야 내가 행복하게 살 수 있을것 같았고 내가 하고싶은 이야기를 춤으로 풀어내는 것이야 말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바로 현대무용이었죠.”
그는 파격적인 안무로도 화제가 됐다. 고전무용에서 주로 사용되는 소품인 갓이나 한복, 사물놀이 악기, 부채 등을 원래의 용도와 관계없이 자유롭게 무대 위에서 펼치고 접었다. 공연 중 직접 배운 판소리를 시원하게 뽑아내기도 하고 마이크를 들고 랩을 하기도 했다.
“통상적으로 춤이라 생각되지 않는 장치들도 결국 같은 선상에 있다고 봐요. 내 몸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춤이 될 수 있고 작품의 소재가 되고 이야기가 되는 거죠.”
최근 이씨는 어린이 무용극 ‘루돌프’ 공연으로 바쁘게 지내고 있다. 겁 많은 원숭이 ‘루돌프’가 새로운 세상과 친구들을 만나며 성장하는 이야기를 담은 이 공연은 국립현대무용단 어린이·청소년 무용 레퍼토리 개발 프로젝트의 첫 작품이다. 해당 프로젝트에 초청된 이씨가 직접 글과 안무를 짜고 무대에도 오른다.
이씨는 “성인 관객들은 동작이 완성됐을 때 박수를 치지만 신기하게도 어린이들은 동작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흥미롭게 본다. 이 과정이야말로 무용수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구간이라 현대무용을 제대로 알아봐 준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그래서 어린이 무용극에 관심을 갖게 됐고 운이 좋게도 젊은 안무가로서는 흔치 않은 기회로 작품을 맡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어렵게만 느껴지는 현대무용에 대한 편견을 깨기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몸으로 직접 경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몸으로 자유롭게 하는 것, 일상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내 몸이 비일상적으로 쓰일 수 있다는 재미있는 상상과 경험을 하면 현대무용이 좀더 친숙하게 느껴질 거에요.”
이씨는 오는 24일과 25일 양일간 서울 성수아트홀에서 2019년 한국춤비평가협회 춤연기상을 수상한 그의 작품 ‘숨구멍’으로 다시 한번 관객을 만난다.
그는 “춤은 제가 만든 세상이고 그 세상에 다양한 분들이 놀러올 수 있으면 좋겠다”며 “단 한 분이라도 제 움직임이나 공연을 의미있게 기억할 수 있다면 행복할 것 같다”고 말했다.